40일간이나 처제 집에서 놀다 오는 아내를 맞으러 딸과 함께 공항에 갔다. 막내동서가 안식년을 맞았다는 소식에 일사천리로 수속을 밟아서 처가 쪽 식구 일곱 명이 켄터키주 루이빌을 다녀오는 길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애틀랜타를 2박 3일간씩 다녀온 것 말고는 세탁소 일을 거들면서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니, 남다른 피붙이의 정에 놀랄 뿐이다.


그사이,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사실, 혼밥을 먹기에 불편할 게 없는 세상으로 변했다는 사실, 젊은 시절에는 이틀도 혼자 있기가 싫었는데 이제는 견딜 만한 세태로 변모했다는 현실이 많이도 혼란스러웠다. 거기다가 사정은 제각각이지만, 1년이면 반 정도를 지방에 내려가서 혼밥을 먹는 동기생을 둘이나 발견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나만 삼식이로 다른 세상에 살았나! 요사이 시대가 좋아진 탓인가. 그보다는 나라가 부자인 덕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어려운 시대를 몸으로 때웠지만, 이 나라에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


근래에 와서 우리 가족은 매년 해외를 드나든다. 올해도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었더니, 아들 가족이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괌을 다녀왔다. 여덟 살인 손자 녀석이 네 번째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도 친인척 간에 별 뉴스가 아닌 나라가 된 것이 꿈만 같다. 내가 70년대에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왔었는데, 그 당시엔 회사는 물론이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비행기를 탄 경험이 꽤 있는데도 여행객들을 보고 있자니 여전히 마음이 부푼다. 아웃도어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손에는 항공권을 들고 설레는 표정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어디론가 떠나기 전의 그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니. 뭔가를 사지 않아도 즐거운 면세점 구경과 기내식에 대한 기대감은 또 어떠한가. 다녀온 곳을 TV와 신문을 통하여 반추하는 것은 또 하나의 덤이다.


가끔 길을 오가다가 공항버스를 본다. 유독 공허한 날, 마주치면 만사 제쳐 놓고 훌쩍 올라타고 싶은 충동에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럴 때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사의 긴급 모객 사이트를 뒤지며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꿈꾼다. 내일이라도 동행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사람마다 개성과 사정이 다르기에 기대를 접은 지가 오래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가야 한다면 공항밖에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일상과 일탈,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낭만의 장소이자 누군가의 생업 현장이고 최첨단 항공기술이 가동되는 현대 문명의 집결지인 공항. 이번 휴가철에도 인천공항 이용객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하니, 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하긴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공항 로비에 앉아 오가는 여행객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함을 이기지 않을까 싶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목적지에 도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경관과 마주치거나 책으로만 알고 있던 진귀한 예술품이 눈앞에 나타나면 잠자고 있던 세포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기분을 앞으로도 여러 번 만끽하고 싶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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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한여름 아이들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여름방학! 물놀이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엄마와 아빠와 해수욕장도 갈 수 있으며,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맛있는 수박을 먹을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신나는 여름방학 나와 친구들은 특별한 모험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중2가 되어 맞이한 여름방학이었다. 중3이 되면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여름방학을 책상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비교적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중2의 여름방학을 이용하기로 했다. 친구 두 명과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과연 무얼 해보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내린 결론은, 강화도 한 바퀴 완주였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5대 섬으로 크기가 꽤 큰 편에 속했던 터라, 도보로 도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자전거였다. 우리 셋은 모두 동의하고 부모님의 승낙을 받아오기로 했다. 나도 부모님께 우리의 의지와 기백을 알리고 우리가 하고픈 일에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를 하셨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2차선을 따라 중학생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먼 곳까지 여행한다는 것에 찬성을 할 수 없고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둘째,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강화도 해안도로가 깔리기 전이었기에 도로 편이 녹록지 않았다. 행여 폭우를 만나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뜨거운 열정이 만들어 냈던 특별한 여름방학 계획이 그렇게 사그라들어갈 때쯤, 한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떤 친구의 이름이 호명될지 귀를 쫑긋 세워 보았다. ‘ET’ 손가락으로 유명했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서 다른 곳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 그때야 나도 다른 친구도 그 전학 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였다. ET 손가락 친구의 전화번호는 자신에게 있다며 전화를 걸어보고 찾아가도 되는지 의견을 묻겠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그 친구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고맙게도 그 친구와 친구 어머니께서 놀러 오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셨고, 반나절 자전거 여행으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여 있어 나를 포함한 친구 두 명도 부모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완행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라고 했지만, 시골이다 보니 한 정거장의 거리는 마을 두세 개를 지나야 나오는 거리라 만만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등하교를 위해 밟았던 페달이 그렇게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겐 특별한 여름방학이 되어버렸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때문에 평탄한 길을 달릴 때보다 두 배는 힘들었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다 보니 체력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어버렸고,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어디 쉬어 갈 곳이 없을까 하여 여기저기 찾고 있는데, 학교가 보였다. 아담한 초등학교였다. 군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가 들어보았던 학교 이름이었다. 직접 볼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단 수돗가를 찾았다. 시원한 수돗물을 틀어 땀범벅이 되어버린 머리에 시원하게 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싶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찾은 수돗가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살맛 난다’는 기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한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36. 5도 이상 뻘뻘 끓던 온몸이 빠르게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않고 다시 길을 떠났다. 요깃거리로 가져온 초콜릿은 녹아서 흐물흐물해졌고, 어머니가 가면서 먹으라고 싸주신 달달한 참외 한 개씩을 손에 들었다. 또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렸다. 오랜 시간 동안 여행으로 말수도 줄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자연의 향기와 꽃나무, 그리고 사람들의 풍경은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방향을 꺾어 왼쪽으로 10여 분 더 달려서 드디어 초등학교 옛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큰 길가까지 나와 반겨주었다. 시원한 얼음이 담긴 물병을 옆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특별한 여름방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한 번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는 것은 누구에게나 로망이다. 비록 전국을 달리지는 못했지만, 용기를 내서 먼 길까지 친구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추억이 되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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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속담 이어가기 하자. 내가 먼저 할게." 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갑자기 머리가 멍멍한 게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할아버지 뭐하는 거야. 심심해! 딱지치기하면 안 될까?" 꾸물대는 내 손을 잡아 끌고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여러 번 해본 숙달된 솜씨인지라 능숙하게 두꺼운 패드를 깔고 딱지를 10장씩 두 패로 나누는 손자에게 “학교서 받은 상장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가져왔냐?” 하니 며느리 가방을 뒤지더니 비닐커버 속에 넣은 상장과 금장트로피를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표창장 1장과 상장이 2장, 그리고 공차는 소년모형의 최우수선수상이라고 찍힌 트로피가 하나다. 조금 전에 며느리가 “지난번에는 4강에 들어서 누구나 똑같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4팀이 경기를 했는데 ○○네가 1등 상을 받았어요.”하더니 그 상인가 보다.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보았으니 상장마다 만 원씩, 4만 원을 주는 거야.”하면서 건넸더니 잽싸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돈 가지고 뭐할 거야?” “저금해야지요.” “저금도 좋지만, 3,000원은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가 군것질할 때 너도 사 먹는 거야. 돈 받은 것은 차 타고 갈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 뒤로 딱지치기에다 오목 두기와 팽이 돌리기를 하다가 8시에 헤어졌다. 월요일 아침, 아들의 안부전화를 받는 아내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너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잖아.” 헤어질 때 지하주차장에서 아내가 손자를 유도해서 돈 받은 사실을 모두가 알았나 보다. 다음날인 일요일, 손자가 사전 허락도 받질 않고 2만 원대의 장난감을 산 게 화근이 되어 ‘아버님 때문에 애 버릇 나빠진다.’는 불평이 있었나 보다. 그게 걱정이라면, 저금한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 할아버지는 부지깽이에게도 도움을 청한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수확기에 놀아달라고 보채면 하던 일도 팽개치고 장독대 옆으로 갔다.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그곳을 벗어나서 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서울 봤나’와 내 겨드랑이를 부여잡고 좌우로 흔들며 ‘불무불무 불무야’를 부르면서 놀아주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그 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손자가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시작한 것이,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10만 원을 묻어두고 3패로 나누어서 하는 윷놀이가 있다. 일회성 이벤트로는 손녀 생일잔치를 마치고 남녀노소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벌린 딱지치기다. 이번에 야심작으로 시도한 것이 상장 하나에 선물 하나였는데,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생하여 중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토요일, 다음 달 초에 아내가 미국에 가게 되어 생일을 2주나 앞당겨 외식을 했다. 샤부샤부 요리를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차내에서, 아들과 손자가 학교생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며느리가 끼어들어서 부부간의 대화로 바뀌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손자가 “속담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네.” 갑작스러운 항의에 아들은 웃으면서 “아버지, 잡문 하나 쓰게 생겼네요.” 뜻도 모르면서 달달 외운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날로그 세대의 착각이었나.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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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치과는 가장 싫어한다. 한때는 큰 비용 때문에 주저하는 이가 많았다.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라 치과에 가면 다 돈이라는 생각으로 아픈 것을 참고 참다가 결국 못 버텨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다. 요즈음은 과거와는 달리 생각도 많이 달라지고 비용도 많이 절약할 수 있어, 치과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엄습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끄러운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금이 저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한때 나는 치과와 문을 닫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과를 처음 찾았던 것이 고등학교 때였으니, 나의 치아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건강을 자신하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을 진단받고 망연자실하듯, 나 역시도 심한 치통으로 치과를 찾고 나서야 나의 치아 상태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유난히 초콜릿을 좋아해서 자주 간식으로 먹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 양치질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어금니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결과를 알려주는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많이 굳어 있었다. 어금니의 한쪽 뿌리가 다 녹아 있고, 염증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더욱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비용이었다.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는 말씀에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수없이 먹었던 초콜릿들이 원망스럽기까지 느껴졌다. 어금니 한쪽 뿌리가 없어지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소견을 내놓은 터라, 그 해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치과를 찾아야 했다. 어금니를 최대한 살려 보겠다는 의사선생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힘들고 아팠지만 견뎌낼 수 있었다.


이후 10년을 버텨 내고는, 드디어 어제 어금니와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인공 뼈를 삽입하다 보니 큰 힘을 줄 수 없어 되도록 반대편 어금니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씹기 위해 노력했고, 딱딱한 음식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를 썼다. 처음 의사선생님은 오래 쓸 수는 없을 거라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나름대로 있는 것을 최대한 오래 쓰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었다.


머지않아, 어금니가 빠진 빈자리에는 임플란트 인공치아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해주셨다.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절대 자를 수 없다며, 머리카락마저도 자르지 않고 소중히 간직했던 그 선조들의 마음이 어금니를 뽑으면서 그 서운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남은 이들을 최대한 잘 보전하여 이가 아파서 치과를 찾는 일이 없도록 가슴속 깊이 새겨본다.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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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4 13: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어렸을 때 나는 유난히 허약한 체질이었다.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올 때는 옆집부터 들러서 내가 살아있는지를 물어보곤 했다니 어떤 상태였는지 짐작이 가리라. 게다가 잦은 배앓이로 방안을 뒹굴기 일쑤였다. 더러는 벽장 속 깊이 숨겨둔 꿀이나 곶감을 먹고 싶어서 꾀병 앓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진짜로 아파서 뒹굴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어디 보자. 내 손이 약손이제.”하시며 배를 문질러 주시곤 했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머리도 자주 아팠는데,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독한 두통이었다. 이럴 때의 할머니는 평소와는 다른 무서운 얼굴로 변했다. 나를 마당 한가운데 무릎 꿇게 하고는 한 손에 부엌칼을, 다른 손에는 음식이 담긴 바가지를 드셨다. 음식물을 휘저은 칼로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훠이, 훠이, 귀신아. 이 밥 먹고 썩 물러가라.”며 고성으로 주술을 외웠다. 그리고는 칼끝이 대문 밖으로 향할 때까지 몇 번이고 칼을 던지곤 했다.


칼국수나 수제비도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굉장한 맛이 났다. 그 비결은 알 수 없었지만 양념보다는 음식은 만드는 손에서 우러나는 손맛 때문인 것 같았다. 고된 밭일에다가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뽑고 삼베를 짜느라 거칠 대로 거칠어진 데다가 핏기마저 없이 깡마른 손에 무슨 괴력이 있어서 그와 같은 신기를 보였던 것일까?


얼마 전,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의 손에서는 일정량의 방사선이 방출되는 게, 그것이 음식을 맛있게 하고 간단한 병도 고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손으로 반죽해서 만든 칼국수나 수제비가 기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보다 맛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특히 오른손과 왼손에는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이 있어 두 손을 비빈 후 통증이 있는 부위를 만지면 탁월한 효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진의를 떠나, 어쨌든 할머니의 능력은 초월적인 데가 있었다.


할머니는 시간만 나면 장독에 마련된 정화수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가족 화목하여 백 년 천 년 복되기를 두 손 모아 비나이다.” 할머니의 주문은 주로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달라지기도 했다. 집안에서 일어난 변고나 대소사의 형통을 빌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장래를 위한 축원도 빠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 큰 병 없고 직장생활과 사회활동도 무난히 하였으니, 그저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


어렸을 적 나는 할머니의 품속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품속에 안기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평온함이 느껴졌다. 더구나 나를 재우기 위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전래동화를 들려주시거나 흥타령이라도 하면 나는 이내 그 가락에 빠져들어 동화 속의 왕자가 되기도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 아니라 사랑의 손이었다. 나는 언제쯤이면 할머니처럼 따스한 손을 가져 사랑을 전수할 수 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가냘프게 보이는 내 손이 부끄럽게만 여겨진다. 할머니! 당신과 같이 한 어린 시절이 한없이 그립습니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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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노래를 좋아하신다. 특히 따라 부르는 것을 좋아하신다. 척박한 대지 위에 집을 짓고 외양간을 만들어 소를 키우던 시절에도, 엄마의 벗은 노래였다. 힘들 때마다 엄마의 노랫소리는 끝나지 않고 내내 이어졌었다. 그때는 몰랐다. 힘든 일을 하시면서 왜 노래를 부르셨는지를.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게 되었다. 두세 살 어린 친구들과 군대 생활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함께 뛰어도 그 친구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무거운 짐을 들 때마다 힘에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뜨거운 한여름에 시작한 군 생활은 더위와도 함께 싸워야 하는 악전고투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을 연신 훔치다 흙바닥에 뒹굴고 달릴 때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못 깨어날 정도였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쉬는 시간 노래를 정말 잘하는 조교의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잊혔던 엄마의 노랫소리가 기억났다. 힘들 때 들었던 그 노래들. 아무 반주 없이 절로 흥이 났었던 노래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것이었다. 온 대지를 집어삼킬 것 같은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줄줄 흐르던 땀방울도 금세 말라버렸다. 살 것 같았다. 턱까지 찼던 숨이 고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기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낼 용기까지 생겼다. 노래와 휴식이 비타민이었다.


옷에 묻었던 먼지를 툭툭 털고 전투화 끈도 다시 한번 동여맸다. 그리고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들을 그냥 가사도 없이 흥얼흥얼댔다. 그것이었다. 힘들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노래의 힘을, 나는 그때야 알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힘들고 짜증은 나지 않았다. 그냥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들에 투정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우리 선조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공부하는 학생이다 보니 그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시험을 봐야 하기에 국사책에 나오는 글들을 달달 외웠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노래와 춤은 힘들고 고단했던 생활 속을 지탱해주던 벗이었다는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놓였다고 해도 우리가 마음먹기 따라서는 그 환경 속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고 희망을 찾아낼 수 있다. 비단 노래가 아니더라도 나만의 주문을 한 가지라도 만들어 긍정 에너지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면, 깜깜했던 나의 앞날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리라 믿어본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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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전화가 왔다. 고시원을 운영하는 형님의 전화였다. “동생아, 형이 며칠간 머리 좀 식히러 가야겠다. 잠시 가게 좀 봐주라.” 한다. 안 한다는 대답도 하기 전에 형님은 다시 “좋은 횟감 잡아 올게.” 라며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을 먼저 내놓으셨다. 낚시광 본능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러지요.” 짧게 대꾸를 했다.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기쁨의 환호성이 제법 크게 들렸다. 소풍을 떠나는 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며칠 후에 형님을 보내고, 고시원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깔끔하다고 자부하던 형님이었지만, 책상에 쌓인 먼지 하며,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것 같은 쓰레기통은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냥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자 해야 할 일이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나왔다. 주방까지 청소를 다 마칠 때쯤, 식사를 하기 위해 냄비를 하나 들고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몇 마디를 건네게 되었다. 한국말이 서툰 조선족 아저씨였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며, 자신이 하는 일을 얘기해주었다. 사무실을 오래 비워 둘 수 없었기에 긴 시간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는 말까지 해주고는 주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6시가 막 넘었을 때쯤,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전날 주방에서 마주쳤던 아저씨가 일을 마치고 귀가한 모양이었다. 한 손에 들린 까만 봉지를 통째로 내밀었다. “드세요!” 하시면서. “이게 뭐예요?” “공사장에서 새참으로 나왔던 빵을 모아 온 겁니다. 나는 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먹는 이들이 없으면 다 버려지는 거라 아까워서 내가 다 가지고 왔습니다.” 아저씨의 손이 부끄러울까 싶어서 서둘러 봉지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어제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운 마음에 보답이나 한다는 생각에 챙겨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봉지 안에는 초코파이, 반달케이크, 보름달 빵 등 서너 가지의 빵들이 담겨있었다. 저녁 전 출출했었던 터라 초코파이를 하나 꺼내어 먹기 시작했다.

봉지 안에서 뒤섞여 있던 탓이었을까. 부스러기가 많이 생겨나있었다. 내가 그분에게 해준 것은 보잘것없는 친절이었다.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잠시 들어준 것이 다였다. 하지만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그분에게는 큰 친절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비록 생채기 난 빵들이었지만 모아서 가져다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모양이다. 전혀 꿈꾸지 않았던 일상의 작은 감동이었다. 고시원 형님이 고시원을 잠시만 봐줘! 할 때마다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랴. 그날 저녁은, 마음이 담뿍 담긴 빵을 먹고 또 먹으면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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