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60대로 결혼 37년 차다. 아직도 가끔은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는 편인데, 특히 짜거나 매운 음식 때문에 그러기도 한다. 왜냐하면 아내는 고혈압 초기에다 6~7년 된 허리디스크 때문에 정형외과와 한방병원에 다니다가 디스크 수술을 한 지 2개월째고, 나는 회사를 나오고서 얻은 당뇨가 9년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내는 딸아이 생각에 맛을 중요시하고 나는 건강을 우선시하기에 발생하는 해프닝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내는 아파트의 통장 일을 보고 있고, 나는 60세에 취득한 공인중개사 자격증으로 일 년 전부터 집 근처에 사무실을 열고 있어 소일거리가 되고 있다. 요사이는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여유시간이 많은 편인데, 이게 또한 다행인 것이 아내의 디스크가 심해진 작년부터는 무거운 가공식품이나 과일 같은 장보기를 내가 맡게 되었고, 수술 후에는 동사무소의 심부름과 쓰레기 버리기가 추가되어도 별로 부담이 안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봄을 맞아 입맛도 돋울 겸, 건강에 도움이 되는 먹을거리를 사려고 아내와 함께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재래시장을 찾았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시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우리나라도 직격탄을 맞고 있음에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는 물가 때문인지 알뜰하게 사려고 연신 노심초사하는 주부들이 많다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 아내 역시 같은 처지인지라, 진열된 갖가지 상품들을 만지작만지작하다 말뿐 그대로 내려놓기 일쑤였다. 결국, 아내는 주로 채소와 생선과 과일 등을 조금씩 샀다. 나는 아내를 도와줄 요량으로 시장에 따라왔기에 비닐봉지를 몇 개 들고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 셈이 되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내는 코끝이 빨간 내 모습을 보고는 여자 동기들 모임 때 가끔 와 봤다는 칼국수 집으로 안내(수를 떠올리면 어릴 적, 옆집엔 분명 방앗간 규모였는데 간판엔 ‘국수공장’이라고 적혀있던 집 생각이 난다. 규격화된 나무틀에 뽀얀 국수를 치렁치렁 널려 말리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던 곳, 숨바꼭질하면서 햇빛 아래 늘어진 국수 뒤로 숨어들었던 기억)했다. 좁지 않은 1~2층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알고 보니 모든 국수요리가 2,500원으로 저렴하고 맛도 있다고 소문난 집이었다. 먹기 바쁘게 다음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게 불편했지만, 일반 음식점에서 파는 5,000원짜리보다 얼큰하고 개운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몸과 마음이 얼어있던 아내와 나는 따끈따끈한 훈기와 저렴한 가격에다 넉넉한 인심으로 사랑스러운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눈길을 끄는 횟집에서 아내는 내가 좋아하던 바다장어 회(요사이는 횟집에 가더라도 영양가가 높고 감칠맛이 나는 광어나 농어를 시키지만 소득이 많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는 바다장어가 저렴한데다 쫄깃하게 씹히는 맛에 시장에서 떠와서 먹었다)를 기억하고는 수월찮은 가격인데도 한 접시 사 넣었다. 소주 한잔과 곁들일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아내와 장을 볼 때는 대형마트보다는 재래시장에 자주 들를 생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살갑고 애틋한 정감을 새록새록 샘솟게 할 수 있는 길이요, 우리 주변의 영세한 상인들을 도와주는 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날 우리 부부는 어서 빨리 경제가 회복되어 나라는 물론 재래시장도 활성화되기를 소망하면서 시장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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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 엄마와 옛날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게 디지털로 통하는 시대라 사진은 구시대의 유물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가끔 꺼내 보면, 오늘을 사는 동력이며 내일을 위해 뛸 수 있는 에너지가 되곤 한다.


젊은 시절 참으로 고왔던 엄마는 어느새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고, 흰머리가 검은 머리카락보다 많아지긴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온화한 미소는 변함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온통 처녀 시절은 흑백사진으로만 채워져 있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사진첩에 남아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다. 나는 사진 찍는 게 많이 어색한 나머지, 어린 시절 사진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도 이상해서 “왜 내 어린 시절 사진은 조금 남아 있어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을 찍기 위해 표정을 짓고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영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커다란 사진첩에 반은 흑백사진이라면, 또 다른 반은 컬러사진이다. 컬러사진이 막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거금을 들여 유명 브랜드의 사진기를 사 오셨는데,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가족 모두 둘러앉아 사진기라는 것을 구경하면서 기뻐했었다. 필름을 집어넣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사진 한 장이 뚝딱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밤새 설레었다.


필름 한 통에 24장 혹은 36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필름을 현상소에 맡길 수 있었던 터라, 하루라도 더 빨리 어떤 모습의 사진이 나왔을까? 궁금해서 보이는 대로 이곳저곳을 찍으러 다녔다.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찾으러 가던 날, 아침부터 긴장을 했다. 사진관을 운영하시는 주인아저씨는 투명색 비닐 봉투에 현상되어 나온 사진들과 현상된 필름을 같이 넣어 주시곤 했었다. 사진기 다루는 게 서툴렀던 초창기에는 소위 햇빛이 들어가 못 쓰는 사진이 많아서, 애초 예상했던 사진의 장수가 모자라기 일쑤였다.


그렇게 모이고 모인 사진들이 사진첩에 한 장 한 장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카가 태어나면서는 조카에게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매년 같은 장소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자세를 취한 사진을 찍어주던 생각이 난다. 조카의 초등학교 전까지의 모습이 연속된 파노라마처럼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주위를 둘러봐도 사진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쉽게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사진을 현상해서 한 장 한 장 사진을 사진첩에 꽂는 풍경도 이제는 보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사진첩을 열면 사진 한 장 한 장 속에 담겨있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사를 해도 장롱 밑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진첩을 가장 먼저 꺼내어 두 겹 세 겹으로 포장하는 엄마의 수고를 이제는 이해할 것만 같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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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댐공사로 수몰되는 바람에 보상문제를 해결하려고 시골에 갔다가 국밥집에 들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었다. 한 식탁에 할머니 혼자 국밥을 드시기에 합석을 하자며 양해를 구하였다. 할머니는 밥 따로 고기국 따로인 따로국밥을 들고 계셨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국은 한쪽에 밀어 놓고 밑반찬에 밥만 드셨다. 다른 곳에 밥집이 있는데 왜 국밥집에 와서 밥만 드시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밥을 다 드신 할머니가 등에 진 가방을 내려 그 속에서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었다.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국을 비닐봉지에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아 담았다. 한 겹 더 봉지로 싸더니 가방에 넣고는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나가시는 것이다.


궁금증을 풀려고 주인아주머니께 물었더니 “요즈음 농촌에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혼자 아니면 노부부만 사는 집이 많아요. 힘든 농사일 때문에 대부분 관절 계통의 질병을 앓고 사시지요. 아마도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에게 주려고 고깃국을 챙긴 모양입니다. 돈이 아까워서 한 그릇 가지고 두 분이 한 끼를 때우는 거지요.” 불현듯, 어제 동생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떠오른다. “우리 동네에 노부부만 사시는 분이 있는데 자식들이 합세하여 지난겨울에 전기 코일 난방을 해드렸어요. 원래 온돌이 있었는데 자식들이 나무하는 것을 염려하여서 해드린 것이지요. 편하게 따뜻하게 겨울을 나시라는 염원으로 놓아드린 것인데, 노인네는 냉골이 된 방에서 떨면서 겨울을 나고 계신답니다.”


하기사, 우리 부모님도 그러하셨다. 동생이 기름보일러로 교체해 드렸더니 냉방으로 지낸다시기에 전기장판을 보내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켜고 아버지는 끄는 것’으로 평생을 티격태격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닐 터이고 기름값은 자식들이 추렴하여 드리는데 그 돈이 너무 아까워서란다. 길바닥에 떨어진 검불 떼기만 주워서 때도 따뜻한 겨울을 날 터인데….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농촌의 어르신들이 ‘편하고 따뜻하게 겨울나는 법’을 모른다. 진짜로 모른다.


글 / 사외독자 이성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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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겨울 방학 방학에 대한 기쁨은 채 1주일을 가지 못했다. 시골에서 방학은 방안에서만 보내기엔 무척이나 답답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엄마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감기라도 걸리면 1주일 동안 골골해야 했고, 눈밭을 헤매고 다니다 보면 양말이며 바지며 두꺼운 외투까지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기 위해서는 찬 바람을 뚫고 30여 분을 걸어야 했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면 주로 찾는 곳이 집 앞에 쌓아 올린 낟가리 자리였다.


추수가 다 끝난 밭에는 겨울철 소의 먹잇감으로 주기 위해 볏짚을 집처럼 쌓은 낟가리가 있었다. 겨우내 소들에게 먹여야 했기 때문에 꽤 높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 낟가리의 높이가 높다 보니 찬바람은 막아주고 해가 드는 양지에서 햇빛을 쐬고 있노라면, 군불을 땐 온돌방처럼 따스했다. 혼자면 심심할 것 같아서 잘 놀고 있는 동생들을 꼬셔서 데리고 나가게 되었고,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흰둥이도 안아서 낟가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며칠 전 많은 눈이 온 탓에 대지는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고, 연속되는 영하권 날씨에 눈이 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낟가리의 양지바른 곳은 사정이 달랐다. 햇살이 오랫동안 비춘 탓일까? 눈이 얼다 녹다를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길이도 다양하고 굵기도 서로 달랐다. 동요 고드름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고드름 안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다. 장난꾸러기 동생들은 신이 나서 고드름을 뚝뚝 꺾어 서로서로 칼싸움을 했다. 하지만 서너 번 부딪히자마자 부러져 땅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나도 하나 가장 작은 고드름을 잘라 우리 흰둥이에게 보여 주었다. 강아지는 맛 나는 먹거리를 인양 고드름을 이리저리 핥았다. 그 모양이 참 귀여워 보였다. 어느새 동생들도 고드름을 똑똑 잘라 입 안에 넣고 오도독오도독 깨물고 있었다. 막냇동생이 건네는 고드름을 받아 나도 깨물어 보았다. 아무런 맛도 없었지만 깨물면 깨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올해 최강한파가 찾아 왔다고 TV에서는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얼마 전, 눈이 온 탓에 어느 집 처마에는 작은 꼬마 고드름이 얼어있었다. 눈 구경이 쉽지 않은 요즈음이라 고드름 보기가 어려운데, 참 오랜만에 보게 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낟가리에서 보았던 그 맑디맑은 고드름은 아니겠지만, 그 모양만은 변함이 없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고드름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고드름의 추억이 오늘은 또렷해진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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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둘이서 입원실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간호사가 운동 중이라 하여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허리에는 복대를 두르고 양손으로 보조기를 밀며 오는 친구와 마주쳤다. 수술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아 팔과 다리의 부위도 빠지지 않고, 등을 헤집고 6개의 볼트를 박아서 성한 데가 없다며 고통스러워한다. “내가 벌써 왜 이러지.”에 “여자 나이 환갑을 지났으니 멀쩡한 곳이 있니? 이곳저곳 고쳐가면서 살아야지!” 했다. 부자 시아버지가 잡아주었다는 1인실로 들어가자 아픈 것도 잊은 듯 추억을 떠올리며 수다 떨기에 바빴다.


120여 호가 사는 우리 마을에서 읍내 여중에 다니는 동급생은 다섯 명이었다. 동네 앞 정자나무 밑에서 만나 10여 리나 되는 학교를 오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공유한 친구들이다. 계절 따라 오디 먹고 메뚜기도 잡았으며 수수를 까먹으면서 오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남학생을 만나면 그날의 구세주다. 대다수가 무거운 가방을 싣고서 우리와 보조를 맞추느라 천천히 가지만, 누군가는 도망을 쳐서 별별 것이 다 들어있는 가방을 뒤진 일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통지표까지 들어있었으니, 그 황당함이란.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3학년 말경에 있었던 찐빵 내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추억은 우리에게는 웃음을 주는 해프닝이지만, 동행한 그녀에게는 눈물을 머금게 하는 슬픔이었다. 네 명이 한 편이 되어 두 살이 많은 그녀를 상대로 찐빵 내기를 했다. 20개까지는 먹어보았다는 그녀가 30개를 먹으면 우리가 값을 치르고, 아니면 60개의 값을 무는 내기였다.


우리는 시장 근처에 있는 허름한 ‘진미찐빵’으로 갔다. 간판 페인트칠도 벗겨져 있고 방 하나와 긴 탁자에 나무의자가 고작이었지만,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남녀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 먼저 온 후배들이 먹고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 방 하나를 차지했다. 찐빵 서른 개를 주문하여 친구 앞에 놓고는 빙 들러 앉아 그녀의 거동만 살피게 되었다. 물 한 모금 먹더니 어느새 20개가 사라졌다. 그 뒤로는 목이 막히지도 않는지 물은 저만치 밀어내고 21, 22, 23, 24개가 입으로 들어간다. 초조하고 불안감이 더해갔다. 25개째. 한 개라도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누구의 손이 먼저랄 것도 없이 네 개의 손이 빵 하나씩을 움켜쥐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버지가 문상을 다녀온 밤에야 알았다. 며칠 뒤에 친구를 만났더니, 찐빵 먹느라고 아버지의 죽음도 몰랐다며 울음부터 쏟았다. “그날 더부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집 앞에 도착하니 곡소리가 들리고 초가지붕에는 아버지의 흰옷이 올라가 있었어. 혼비백산해 방으로 뛰어드니 엄마의 꾸지람이 따라왔지. ‘너는 아버지가 죽은 줄고 모르고 어디를 쏘다니다가 이제야 오나? 네 동생이 학교를 다 뒤져도 없고….’ 한없이 눈물을 쏟아도 시원찮을 판에 배가 불러서 울 수가 없더라. 억지로 쑤셔 넣은 찐빵이 불어터져서 소리 내어 울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이틀간을 밥 한 톨 안 먹고 정신을 놓고 있으니, 도리어 가족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는 뒷전이고 살아있는 내 걱정에 정신들이 없었단다. 내가 딸이냐, 웬수지.”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등학교 진학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철없던 시절의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고 한다.


추억에 웃고 울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혼자 우두커니 있을 남편 생각으로 친구와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글 / 사외독자 고순자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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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메뉴도 비빔밥이었다. 역시나 친구는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가기 전에 “고추장은 빼주세요.”라고 말을 했다. 5년이 지나, 만난 친구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과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참 존경스러운 친구라 배울 것도 많은 친구다. 이 친구와 친해진 것은 대학을 들어가서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동문회, 동아리, 향우회 등으로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같은 과 친구들과 사심을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다가, 같이 수업을 듣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친구가 이 친구였다. 얼굴로 봐서는 귀티가 나는데, 옷차림이 수수해도 너무 수수했다. 여자 동생의 옷을 빼앗아 입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남들한테 얻어 입은 거 같은 날도 있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성적표가 나오면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다. 지방 캠퍼스였던지라 주말이면 대다수 학생이 수도권 버스며 기차를 탔다. 금요일 저녁이면, 캠퍼스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학생들로 인해 적막마저 느낄 정도였다. 금요일 저녁을 피해, 한가롭게 버스를 이용하고자 토요일 오전을 이용했는데 마침 그 친구와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할까 말까 망설이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여동생 있니?” “있어.” “그러면 가끔 동생 옷도 빼앗아 입기도 하니?”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괜히 물어본 것은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이 옷도 동생 옷이야. 동생이 요즈음 안 입는 옷이라,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내가 입어.” 너무도 당당하면서도 조리있게 자신의 소신을 말하는 바람에 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꽤 괜찮은 친구네!’ 순간 든 생각이었다.


얼마 후에 안 사실은 좀 더 놀라웠다. 친구는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학교였으며, 친구의 아버지는 서울에 유명한 사립대학 교수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이 친구가 유일했고,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했다. 서서히 그 친구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남을 헐뜯거나 거친 욕을 하거나 남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는 친구라 더욱더 마음에 드는 면이 많아졌다. 그런 친구와 학기말 시험을 보고 나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어떤 메뉴를 고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는 서슴지 않고 비빔밥을 골랐다. 나도 같은 메뉴를 선택했다. 드디어 비빔밥이 나오려는 순간, 친구는 “고추장은 빼주세요. 저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다른 메뉴를 선택하지? 비빔밥에 고추장이 안 들어가면 맛이 나나?” “그래도 나는 비빔밥이 좋다.” 진짜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친구는 쓱쓱 비벼 먹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살다 보니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늘도 친구는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맛깔스럽게 먹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분수에 넘치지 않는 행동과 말, 생각을 하는 이 친구는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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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중학교 다니는 조카를 돌봐주기 위해 시흥으로 거처를 옮긴 지 몇 개월이 되어간다. 엄마와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몇 개월 집을 비우고 있으니 집 안 구석구석이 빈 느낌이 든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지면서 커다란 집에 사람도 적다 보니 방문만 열어도 한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지난주는 큰마음 먹고 누나네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고 일찍 시흥으로 향했다. 몇 개월 만에 찾은 시흥은 변한 것은 없는데 월곶을 지나 시흥에 발을 딛는 순간, 볼에 닿는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아침부터 춥고 기온도 낮았지만 설렘과 기대감으로 인해 추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으리라.


아침부터 서둘렀던 것은 훌쩍 자라버린 딸 같은 조카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등교 시간이 자율화되다 보니 옛날처럼 새벽에 등교하는 풍토는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화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조카는 등교 준비에 분주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고 한 달이 다르다고 하던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린애 같던 조카도 이제는 코 흘리는 초등학생 티를 확 벗은 어여쁜 중학생의 모습이었다. 중1이 초등학생 연장선이라면, 중2의 겨울은 고등학생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반갑게 맞이하는 조카의 모습 속에서 가족이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 아로새겨졌다. 짧은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몇 개월의 텀을 까맣게 잊게 해주었다. 가방을 메고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현관문을 나서는 조카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집어주자 조카는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미리 전화를 해서인지 엄마는 주방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들어 내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조카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물어보자 엄마는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늘어놓으셨다. 엄마와 함께한 밥상머리에서도 이야기보따리는 끝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수다들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구수한 입담이 밥맛만큼이나 달았다. 몇 달 만에 본 엄마의 모습은 흰머리가 하나둘 늘기는 했지만 마치 세월을 거스른 듯한 평안해진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뭐 좋은 거 많이 드시나 봐요? 얼굴이 전보다 더 좋아지셨네요.” 말없이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면서 “난 좋은 거 안 먹는데….” 하신다. 아마도 사랑하는 조카와 누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는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도 여전히 추웠다. 며칠 전 신문에서는 사랑의 온도탑이 점등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바야흐로 마음도 몸도 꽁꽁 얼게 하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올해 겨울은 얼마나 더 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지만 사랑하는 가족, 조카, 부모님이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추위쯤은 가뿐히 이겨내고 2017년 따뜻한 새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추울수록 가족의 힘으로 서로의 손을 더욱더 꼭 잡아주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바람을 가져본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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