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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11 [에피소드] 멋있는 친구
  2. 2016.12.21 [에피소드] 가족의 힘
  3. 2016.12.07 [에피소드] 40
  4. 2016.11.23 [에피소드] 김장
  5. 2016.11.11 [에피소드] 키즈폰
  6. 2016.10.14 [에피소드] 책갈피
  7. 2016.10.07 [에피소드] 뒷도의 추억


오늘 메뉴도 비빔밥이었다. 역시나 친구는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가기 전에 “고추장은 빼주세요.”라고 말을 했다. 5년이 지나, 만난 친구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과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참 존경스러운 친구라 배울 것도 많은 친구다. 이 친구와 친해진 것은 대학을 들어가서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였다. 처음에는 동문회, 동아리, 향우회 등으로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같은 과 친구들과 사심을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다가, 같이 수업을 듣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친구가 이 친구였다. 얼굴로 봐서는 귀티가 나는데, 옷차림이 수수해도 너무 수수했다. 여자 동생의 옷을 빼앗아 입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남들한테 얻어 입은 거 같은 날도 있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성적표가 나오면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다. 지방 캠퍼스였던지라 주말이면 대다수 학생이 수도권 버스며 기차를 탔다. 금요일 저녁이면, 캠퍼스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학생들로 인해 적막마저 느낄 정도였다. 금요일 저녁을 피해, 한가롭게 버스를 이용하고자 토요일 오전을 이용했는데 마침 그 친구와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할까 말까 망설이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여동생 있니?” “있어.” “그러면 가끔 동생 옷도 빼앗아 입기도 하니?”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괜히 물어본 것은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분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이 옷도 동생 옷이야. 동생이 요즈음 안 입는 옷이라,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내가 입어.” 너무도 당당하면서도 조리있게 자신의 소신을 말하는 바람에 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꽤 괜찮은 친구네!’ 순간 든 생각이었다.


얼마 후에 안 사실은 좀 더 놀라웠다. 친구는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학교였으며, 친구의 아버지는 서울에 유명한 사립대학 교수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이 친구가 유일했고,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했다. 서서히 그 친구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남을 헐뜯거나 거친 욕을 하거나 남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는 친구라 더욱더 마음에 드는 면이 많아졌다. 그런 친구와 학기말 시험을 보고 나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어떤 메뉴를 고를까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는 서슴지 않고 비빔밥을 골랐다. 나도 같은 메뉴를 선택했다. 드디어 비빔밥이 나오려는 순간, 친구는 “고추장은 빼주세요. 저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거든요.” “그러면 다른 메뉴를 선택하지? 비빔밥에 고추장이 안 들어가면 맛이 나나?” “그래도 나는 비빔밥이 좋다.” 진짜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친구는 쓱쓱 비벼 먹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살다 보니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늘도 친구는 고추장이 빠진 비빔밥을 맛깔스럽게 먹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분수에 넘치지 않는 행동과 말, 생각을 하는 이 친구는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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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중학교 다니는 조카를 돌봐주기 위해 시흥으로 거처를 옮긴 지 몇 개월이 되어간다. 엄마와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몇 개월 집을 비우고 있으니 집 안 구석구석이 빈 느낌이 든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지면서 커다란 집에 사람도 적다 보니 방문만 열어도 한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지난주는 큰마음 먹고 누나네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고 일찍 시흥으로 향했다. 몇 개월 만에 찾은 시흥은 변한 것은 없는데 월곶을 지나 시흥에 발을 딛는 순간, 볼에 닿는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아침부터 춥고 기온도 낮았지만 설렘과 기대감으로 인해 추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으리라.


아침부터 서둘렀던 것은 훌쩍 자라버린 딸 같은 조카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등교 시간이 자율화되다 보니 옛날처럼 새벽에 등교하는 풍토는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전화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조카는 등교 준비에 분주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고 한 달이 다르다고 하던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린애 같던 조카도 이제는 코 흘리는 초등학생 티를 확 벗은 어여쁜 중학생의 모습이었다. 중1이 초등학생 연장선이라면, 중2의 겨울은 고등학생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반갑게 맞이하는 조카의 모습 속에서 가족이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 아로새겨졌다. 짧은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몇 개월의 텀을 까맣게 잊게 해주었다. 가방을 메고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현관문을 나서는 조카의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집어주자 조카는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미리 전화를 해서인지 엄마는 주방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들어 내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조카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물어보자 엄마는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늘어놓으셨다. 엄마와 함께한 밥상머리에서도 이야기보따리는 끝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수다들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구수한 입담이 밥맛만큼이나 달았다. 몇 달 만에 본 엄마의 모습은 흰머리가 하나둘 늘기는 했지만 마치 세월을 거스른 듯한 평안해진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뭐 좋은 거 많이 드시나 봐요? 얼굴이 전보다 더 좋아지셨네요.” 말없이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면서 “난 좋은 거 안 먹는데….” 하신다. 아마도 사랑하는 조카와 누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는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도 여전히 추웠다. 며칠 전 신문에서는 사랑의 온도탑이 점등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바야흐로 마음도 몸도 꽁꽁 얼게 하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올해 겨울은 얼마나 더 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지만 사랑하는 가족, 조카, 부모님이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추위쯤은 가뿐히 이겨내고 2017년 따뜻한 새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추울수록 가족의 힘으로 서로의 손을 더욱더 꼭 잡아주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바람을 가져본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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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고 오는 것은 플라스틱 가방이다. 그 안에는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장난감이 20개나 들어있다. 가족들과 놀다가 시시해지면 방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자고 조르지만, 여러 번 규칙을 알려주어도 헷갈리는 나 때문에 토라지기 일쑤다. 그러고는 혼자서 상대편 역할까지 하면서 즐긴다. 자동차가 카드를 만나 순간적으로 변신하는 로봇 장난감인데, 작년부터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나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6개를 사주었는데, 7개월 전 조카딸 집에 다녀와서는 소유욕이 강해졌다. 손자보다 한 살 많은 형이 40개를 보여주면서 호기심을 증폭시킨 탓이다.


조카사위는 20대에 도제로 들어가 사진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30대 후반인 지금은 강남에서 웨딩 삽을 운영한다. 알짜배기 땅에 지은 넓은 공간을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신기한 장난감에다 먹을거리에 빠져들어서 10시가 넘어 집에 가자는 데도 손자와 손녀는 더 놀다 가겠다며 졸랐다고 한다. 특히 손자는 변신로봇에 푹 빠져서 자고 갈 테니까 먼저 가라고 떼를 썼단다. 동일한 원리의 변신 기능으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만 달라질 뿐인데, 왜 그렇게도 열광할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통한 선전에 현혹되었나 보다. 녀석은 자기는 28개밖에 없는데 아빠가 사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말 잘 들으면 한 달에 2개씩 12개를 사주마.” 손가락 걸고 확인도장까지 찍고 약속한 것을 이번에 지키게 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빈곤한 환경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에서 얻은 막대기나 돌멩이로 장난치면서 놀았지만, 지금의 어린이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최첨단 문화를 접하면서 살아간다. 녀석이 유치원생이었을 때는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흉내를 낸다고 ‘꿀꿀이 삼 형제’와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할아버지, 내가 할게.”라며 중간에서 가로채더니 나보다 더 길게 더 재미있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녀석 또래일 때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똑같은 이야기를 10번씩이나 반복해도 까르륵 웃으면서 들어주었는데 말이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어 녀석에게 들려줄 거라고 오래전부터 보관해 온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이솝 이야기」, 「노란 손수건」 같은 서적을 없애버렸다.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아내는 최신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데이터 이용에는 애비 어미 것을 가지고 논 손자에게 한참을 뒤처져 있다. 옆에 있으면 동영상 촬영이나 이모티콘이나 이모지를 어떻게 불러오느냐고 묻기 일쑤다. 어제는 손자와 통화하면서 녀석이 쓴 일기와 같이 보라고 해도 모르니까 한참을 설명해주더니 “할머니, 앞으로도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하든지 문자로 보내세요.” 한다. 우리네야 3G급인 폴더 폰도 버거워하고 데이터 이용은 컴퓨터에 의존하지만, 손자 녀석은 애비 폰으로 동영상 찍고 보기, 책 읽기, 음악 듣기, 길 찾기 등도 해결한다. 조금만 더 지나 자기 스마트폰을 가지면 지구 반대쪽에 일어나는 사건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을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실린 이상한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만날 때마다 성숙해진 손자가 부럽기도 하고 버겁기도 하다.


글 / 사외독자 이종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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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찡해지는 아침이다. 아직 가을을 제대로 느껴 볼 새도 없었는데, 기온은 급강하했다. 겨울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어도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을 수 없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어제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갑자기 추워지고 나면, 엄마는 김장 생각이 가장 먼저 나는 것 같다. “올해는 한 30포기 정도는 김장해야 할 텐데...”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 살 때는 추위가 일찍 찾아오기 일쑤라 도시에서보다는 김장을 서둘러 하곤 했다. 물론, 그때는 엄마가 한창 젊으셨을 때라, 혼자 100포기의 김치도 다 해내곤 하셨다. 배추를 절이고, 김치 속을 만들고, 일일이 속을 넣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철인에 가까웠다. 그때는 우리는 어렸던지라, 김장을 돕기보다는 엄마가 해놓은 김장김치를 먹는 데 재미를 붙였다.


그나마 김장을 도와드리면서 재미있게 끝마쳤던 때는 군대 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집은 정육점과 식당을 같이 했다. 식당을 하다 보니 김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밑반찬으로 김치가 나가야 해서 100포기 이상을 담가야 했다. 식당을 하면서 알게 된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와서 도와주셨다. 나도 김장을 돕는다고 큰소리를 쳤던 터라 김장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주로 힘을 쓰는 일을 했다. 강판으로 간 무만 해도 20여 개가 족히 넘었고, 절인 배추를 꺼내는 일도 도맡아 했다. 조심한다고 했었지만 사방팔방으로 물이 튀는 바람에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둘렀음에도, 양말이며 바지며 흠뻑 젖었다. 김치를 하면서 바지를 두 번 갈아입었다.


장시간 계속되는 노동에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저리고 손목도 시끈시끈 했지만, 엄마와 두 분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나서 꾹꾹 참을 수 있었다. 수다는 이럴 때 꼭 필요하구나! 마음속 깊이 느꼈다. 밤늦도록 김장은 계속되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 한다는 말씀에, 나만 슬쩍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빨갛게 묻은 속이 먹음직스럽게 버무려지고, 잘 절인 배추 속에 끼워 넣자, 근사한 포기김치로 탈바꿈했다. 김장 숙련공들 아니랄까 봐, 준비 과정은 길었지만 김치로 만들어지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뚝딱뚝딱하면 김치 하나가 완성되었으니. 김장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엄마는 부엌에서 한참 끓여 낸 아롱사태를 꺼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듬성듬성 썰어낸 고기 한 조각에, 배추에 김치 속을 얹어 먹으니 그 맛이 꿀맛이었다. 제일 좋은 암퇘지의 사태 살이라는 것을 엄마는 강조하셨다.


그날의 특별했던 김장은 잊을 수가 없다. 김장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이제는 김장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는다. 식구도 많지 않을뿐더러 김치 냉장고 덕분에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번 김장은 그 즐거웠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도록, 가능한 여러 명을 모아서 함께하는 김장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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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으나 생소한 번호라 뚜껑을 닫아버렸다. ‘솥뚜껑 보고도 놀란 가슴’이라고, 금전적으로 손실은 없었지만 보이스피싱에 두 번이나 끌려다녀서 곤혹을 치른 일이 아직도 생생해서다. 조금 있자니 “손자가 키즈폰을 선물 받아서 한 전화이니 받아주세요.”라는 아들의 문자 메시지가 떴다. “할아버지! 나 키즈폰 샀어. 그런데 30분 넘으면 안 되니까 오래 못해요.” 하고는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기분을 북돋워 주려고 “할아버지가 전화하는 것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받아라.” “그건 아는데, 공부 시간에는 하지 마세요.”라면서 언제 시간이 난다고 알려주는데도 입력이 되지 않는다.


어린이에게 휴대전화는 여러모로 좋지 않다면서 고학년이 돼야 사 줄 거라고 하더니 웬일일까? 아내는 “사부인이 학교와 학원에서 손자를 데려오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해서 서둘러 구매했다고 하네.”란다. 그 뒤로 문자를 보내면 자기 것으로는 안 되는지 애비 휴대전화로 답을 보내고, 손자 번호가 뜨면 곧바로 중단시키고 내가 전화를 거는 것이 이심전심이 되어 가끔 소통하고 있다. 수업이 없다는 일요일에 전화를 걸지만 “할아버지, 숙제 중이니 한 시간 뒤에 전화 주세요.” 하면서 끊은 것도 여러 번이다. 괜히 내 기분 좋으라고 녀석에게 방해만 하는 늙은이인 것 같아 무척이나 미안하다.


지난 금요일에는 전시회 가는 길에 손자가 다니는 학교를 구경하려고 그 동네의 전철역에서 내렸다. 전철역 출입구가 아파트이기에 ‘다음지도’에서 확인한 코스로 걸었더니 5분 정도 걸렸다. 철문에는 ‘명문○○’이라고 크게 각인되어 있었다. 정문에서 바라보니 정면과 좌측으로 건물 두 개가 배치되었고 운동장은 인조잔디가 깔렸으며 공부시간이라 누구 하나 보이지는 않았다. 내 나이의 수위에게 “손자가 1학년 5반인데 어느 건물입니까?” 했더니 좌측 건물의 2층 중간쯤이라고 알려주신다. 나는 수첩을 꺼내서 골대 4개까지 포함한 약도를 그렸고, 집에 와서는 좀 더 상세하게 ‘내 손자 다니는 길’이라며 아파트에서 교실까지 예상되는 경로를 화살표로 표시해서 아들에게 보내주었더니 녀석이 “할아버지, 짱이야!”라고 소리 지르며 엄청 좋아하더라고 전한다.


그저께는 아내가 “요사이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손자 또래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딱지치기를 하네. 손자는 10장을 가지고 있지만 잃을까 걱정되어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한데.”라고 한다. “그런 일로 애가 기죽으면 되나. 내가 더 사주면 되겠네.” 인터넷을 통해 플라스틱으로 된 대왕딱지를 주문했다.

“○○야, 할아버지가 왕 딱지를 샀다. 내 딱지를 따서 친구들하고 붙어 보아라. 원한다면 100장이라도 사 줄 테니 잃을 것 두려워하지 말고 겨루어 보는 거야!” “할아버지, 나도 다 알아. 친구하고 겨루어서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체력은 떨어지고 순발력은 둔해지고 몸 여기저기 고장이 난 노인에겐 손자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더 바랄 게 없는 비타민이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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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를 정리하다가 책 속에 꽂혀 있던 책갈피를 발견했다. 단풍잎에 코팅을 입힌 책갈피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0여 년이 훌쩍 넘은 것이었다. 한참 펜팔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가을 분위기를 낸다고 노란 단풍잎에 코팅을 입혀 편지 속에 넣어 보냈더니, 답장 안에는 빨간 단풍잎에 코팅을 입혀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일 멋진 단풍잎을 고르기 위해 한참 동안 단풍잎 나무 곁을 이 잡듯이 뒤졌다는 진담 반, 농담 반의 글에 한동안 설레었다. 그런 정성에 감복하여 고이고이 모셔 두었던 그 책갈피를 한동안 잊고 살았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그때와 다를 것이 없는 단풍잎 책갈피를 보면서 그때 꿈꾸었던 추억도 하나하나 꺼내볼 수 있었다. 낭만이 살아있던 시대답게, 동네 서점에 가면 나이 지긋하신 책방 어르신은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끼고 계산대에 놓은 책마다 포장지를 씌워 주셨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신 터라 책 한 권을 포장하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으셨다. 포장하는 짧은 동안 책을 사려는 이가 행여 머쓱해질까 싶은지, 주인 어르신은 책에 대한 짧은 코멘트를 빼놓지 않으셨다. 이윽고 포장이 완성되면 빼놓지 않고 하시는 일이 책갈피를 끼워주시는 것이었다. 직사각형의 모양에 맨 위쪽에는 구멍을 내어 색실을 꿰어 넣은 형태의 책갈피였다. 그 책갈피에는 좋은 글이나 속담 명언 혹은 짧은 시구가 들어가 있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어디쯤 읽었는지 표시가 어려웠을 때 책갈피는 등대였고 이정표였다. 한쪽 귀퉁이를 접거나 한쪽 페이지를 반으로 접고 나면 그 당시에는 편할지 모르겠으나 다시 책을 펼쳐 보았을 때 그 표시가 남아 있어 짜증이 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책갈피는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난 후 깔끔하고 흠이 없는 책을 책꽂이로 다시 꽂는 것만으로도 그때는 행복함을 느꼈으니.


그래서 책을 사고 나면 가능하면 책갈피를 하나 더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하면서 부피가 많이 나가는 책이나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들은 정리한 탓에 책꽂이에 많은 책이 꽂혀 있지는 않다. 최근에는 보고 싶은 책들도 많지 않고 스마트 기기로 책을 볼 수 있어서 책 사는 횟수도 정말 줄어들었다. 대형 서점을 가도 책갈피를 보기도 어렵고, 있다고 해도 얻어올 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한다. 책갈피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식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오랜만에 보게 된 추억의 책갈피를 보면서 책갈피에 대한 욕심을 내볼까 생각 중이다. 이 가을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서 손편지에 빨간 단풍잎을 살짝 넣어 보내보리라 마음먹어본다.


글 / 사외독자 한상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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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추억이다. 추억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가도 아득한 옛일처럼 가물거리기도 한다. 추석이나 설이라도 물 빠지는 나일론 양말이 유일한 선물이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른들 따라 친척 집을 돌면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우리 세상이었다. 끼리끼리 모여 땅따먹기, 강 건너기, 자치기 놀이를 하다가, 해 그름 판이 되면 남녀 구별 없이 뒷동산으로 모여들었다. 마무리는 언제나 골목으로 편을 갈라 산등성이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이런 자연과 함께하는 놀이를 찾아보기 힘든 손자들을 위하여 고심한 것이 윷놀이다. 역사는 일천하여 겨우 세 번째지만 매회 추억거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보통 윷놀이에서는 넉동이 먼저 나는 팀이 그 판을 이기지만, 며느리의 친정 가는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하여 두 동으로 하고, 한판이 끝날 때마다 지폐 한 장을 가져가도록 하여 열판을 두었다. 이번에는 변수를 늘리고 박진감을 더하기 위하여, 한 판에 석 동이 먼저 나는 팀이 이기고 지폐 두 장을 가져갈 수 있으며 다섯 판을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었다. 누군가는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여러 변수를 추가한다지만, 우리는 사위가 뒷도 표시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루 전에 온 손자와는 예비 윷놀이를 하여 녀석이 두 판을 이겼기에 “내일 얼마나 딸 생각이니?”하고 물었더니 “4만 원 딸 거야.”한다. 욕심을 숨기는 녀석이 신통하기도 하지만, 돈의 개념을 안 손자가 어른이 되어서도 돈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추석 당일, 약속대로 9시 조금 전에 사위가 도착했고, 곧이어 아들 가족이 들이닥쳤다.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뛰어와서 안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어질어질하다. 늙은 탓인가! 오늘따라 녀석들의 키가 훌쩍 커 보인다.

푸짐한 식사에다 과일과 커피까지 마시고, 곧바로 윷판을 벌렸다. 가위, 바위, 보로 정한 순서대로 우리 부부가 먼저고 사위와 아들 순서로 우열을 가려 나갔다. 우리 부부는 약속대로 징검돌이 되어주기로 하고, 앞서가는 말을 잡을 기회가 생겨도 두 동산이나 석 동산이를 만드는 것으로 말을 썼다. 예상대로 석 동산이를 만들어 나가다가 중간쯤에서 손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손자는 양팔을 들어 올리면서 자기 덕에 이겼다고 잽싸게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벌써 손녀는 지루한 모양이다. 자기 차례가 되어도 방에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나오지 않아 오빠 애를 태운다.


붙들려 와서도 두 손으로 윷을 쥐고는 오빠 눈치를 살살 보거나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시간을 끌다가 던지니 연거푸 윷이다. 한 동 나고 두 동산이 참먹이를 향하는데 손자가 던진 것이 개가 되었다. 손자는 걱정이 되어 “뒷도가 나오면 고모부한테 잡히고 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처음으로 나온 뒷도가 손자를 슬프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며느리가 “네가 한 말 때문에 우리가 지고 말았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손자는 삐쳐선 안방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네 판이 끝나니 아들과 사위 팀이 공평하게 두 판씩 이겼다. 이제는 마지막. 모두가 어머님이 이겨야 한다지만 우리는 디딤돌 역할만 하다가 석 동산이를 만들었으나 윷이 나는 바람에 앞서 나가게 되었다. 여러 번의 웃음과 한숨이 교차하고서야 제일 먼저 참먹이에 도착했다. 다시 내 차례. 당연히 이겼다고 탄성이 나와야 하는데 뒷도로 한숨만 나오는 처지가 되었다. 날걸과 방을 지난 안찌에도 아들이 버티고 있었다. 사위는 우승에서 멀어 있었지만, 아들 편에서 도가 나오면 우린 ‘다 된 밥에 코 빠트리기’ 신세가 된다. 아쉽게도 개가 나왔다. 며느리가 날걸에 있던 말을 참먹이로 옮겨 놓았다.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 무슨 말에도 무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던진 윷은 도가 아니라 개가 되어 천만다행이다.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아내는 잽싸게 두 장을 챙겼다. 명절이면 내 지갑은 얄팍해지고 아내는 며느리와 사위가 주는 용돈으로 두둑해지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되었으면 한다.


글 / 사외독자 이선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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